일본 여고생

오키나와의 일본 여고생? 괜찮아유, 그리고 삼별초의 기억과 충청도의 여유

꿈을 꾸는 지렁이 2025. 11. 6. 06:30

오키나와 일본 여고생

🌞오키나와 취재? 기분은 여행

오키나와 수리성 복구 관련 취재중,  나하 시내를 걷다가
짧은 치마에 검게 그을린 피부의 건강미 넘치는 일본  여고생? 한 명을 마주쳤다.
피부는 햇살에 그을려 건강한 갈색빛이 돌았으며,
머리카락은 묶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도쿄의 일본 여고생과는 사뭇 달랐고 꽤 이국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장은 거의 없었고,
표정은 밝고  따뜻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본 여고생이었다.

 

근데 내가 느끼는 이 위압감은 뭘까?

 

국적상으로도 엄연히 일본인이고, 

일본 교육 시스템 속에서 성장한 누구도 부정 못하는 일본 여고생
하지만 내가 지금껏 일본 취재 여행 중에 만나온 그 어떤 일본 여고생들과도 전혀 달랐으며,
그녀의 피부, 표정, 말투, 분위기—이 모든 것이  그녀가 특별하다는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오키나와 여고생이었다.

본토 일본 여고생

👗오키나와 여고생의 스타일과 성격

오키나와 여고생은 짧은 치마에 맨다리를 드러내고,
스타킹은 거의 신지 않는다.


햇살에 자연스럽게 그을린 갈색 피부와
화장기 없는 얼굴은


‘꾸미지 않아도 괜찮다’는 지역적 여유를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본토의 일본 여고생의 트렌드보다
실용성과 해방감을 중시한다.


말투는 느리고 부드럽고,


표정은 밝고 개방적이다.

🍜바닷가의  노점에서  먹는 소키소바는 그 누구도 안부럽다...

점심 무렵, 바닷가 근처의 노점에서 
소키소바를 먹고 있는 오키나와 여고생들을 보았다.


그녀는 친구와 마주 앉아 있었고,
교복은 단정했지만, 자세는 느긋했다.

 

나도 반 호기심에 속으로는 별 기대를 하지 앉은체

무표정하게 소키소바를 주문했다.

 

오키나와에 온이후 이미 몇번이나 소키소바는 먹었기 때문에 

맛이야 거기서 거기겠지라고 샹각했다.

 

나온 음식은 역시나 별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고 .

기대는 않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실망....

 

한숨을 내시며... 젓가락을 들고 국물을 떠먹은 순간

 

나도 모르게 손끝이 떨리렀다..

우와...진짜 맛있다....

나도 모르게 한국 말이 튀어 나왔다...


소키(돼지 갈비)는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고 

 

국물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그래 진국이었다.

 

이 말밖에 적당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진국

 

아...소바 한그릇으로 이렇게 행복해 질수 있다니.

나는 지금 세상의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아쉽게도 마지막 국물까지 다 마셔버린  직후 아직도 천천히 소바를 먹고 있는 

오키나와 여고생 들을 보며 왠지 모를 이질감 아니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꼈다.

🗾일본인듯 일본 아닌듯 ...

 오키나와는 언제부터 일본이었을까?


오키나와는 본래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다.


중국, 조선, 동남아시아와 교류하며 해상무역으로 번성했고,
자체 언어와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1879년, 메이지 정부는 군경을 보내
류큐 정부를 해산시키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왕은 도쿄로 압송되었고,
오키나와는 일본의 지방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격전지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전후에는 미국의 군정 통치를 받다가 1972년에야 일본으로 반환되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은
오키나와 여고생의 스타일에도 스며들어 있다.


도쿄처럼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신만의 리듬과 느긋함을 유지하는 태도.
그건 단순한 지방색이 아니라,

‘외부에서의 핍박’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다.

🇰🇷 오키나와와 우리의 1000년의 인연

통일 신라에서 시작되어 

고려를 지나 오랜시간 동안  우리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오키나와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 왕국과의 교류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14세기 후반부터 조공 외교와 표류민 송환이 이어졌고,
조선은 류큐를 ‘유구국(琉球國)’이라 불렀다.


류큐는 조선에 48차례 사신을 보냈고,
조선은 2차례 사절을 파견했다.


표류한 제주 어민을 돌려보내거나,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을 송환하기 위해
사신이 파견되기도 했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6권, 세종실록 10권 등


지금은 대한민국과 일본의 오키나와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만
정겨운 오래된 이웃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다.

 

 오키나와에서 만난 사람들

 

특히 오키나와 여고생들의 꾸밈없는 천진함과 세상을 바라보는 느긋함에서


아직도 우리와 교류했던

1000년전의 류큐 왕국의 잔존이 남아있는 듯  느껴졌다.

😄도쿄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릴적 봤던 코메디에서 최양락이란 개그 맨이 했던 콘트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해악적인 웃음을 지으며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 괜찮아요를 남발하던 그모습...

 

참 어릴적 많이도 따라하고 따라한다고 엄마에게 많이 혼나기도 했던 그 멘트

괜찮아유..그럴수도.. 있쥬우..

이 말을 오키나와에서 일본어 버젼으로 들을 줄이야..

 

소키소바를 주문한 지 25분이 지나
슬슬 짜증이 올라오던 내게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30분 정도는 괜찮아유.”

좀 늦을 수도 있쥬우....


그 말투는 느리고 부드러웠고,


그 표정과 웃음은 내가 어릴적 코메디에서 느꼈던 그 모습  그대로 였다.

 

시간을 다루는 방식, 해악, 웃음 


세상을 달관한듯한  말투와 꾸밈없는 감정표현등 

 

원지 모르게 난 충청도 시골에 계신 이모 할머님을 떠 올렸다.

 

나라도 다르고 연령도 다르지만 뭔가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문득 떠오른 또 하나의 이야기.

1273년, 제주 항파두리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인 삼별초.
기록에는 그들이 모두 섬멸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82년 오키나와의 가마터에서 나온 고려계 기와에는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출처: 『고려사』 권137, 열전 제50, 삼별초 항목 / 일본 오키나와현 문화재 보고서 (1982)

 

즉 계유년에 고려장인이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 고려기와에 기재된 계유년이 고려사에서 삼별초가 섬멸되었다고 기록된 1273년이라면

삼별초는 섬멸된것이 아니라 오키나와에 거점을 무사히 옮긴 것이 된다.


또한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듯 진도 용장산성에서 발견된 기와와
오키나와 우라소에성에서 출토된 기와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출처: 『진도 용장산성 발굴조사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 『우라소에성 유적 조사보고서』 (오키나와현 교육위원회)

 

삼별초의 일부가 바다를 건너
이 섬 어딘가에 닿았다는 전설은


오키나와의  민간 설화에도 전해져 내려온다.


그녀는 오키나와 여고생이었지만,


그 여유는 충청도 같았고,


그 웃으과 해악은 한국과 닮아 있었다.

나는 또다시  그녀들이 섬에 도착한 삼별초의 먼 후손이 아닐까하는 

망상에 젔어본다...